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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뜻 의미 그리고 3명의 학생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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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조이군 2020. 11. 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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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날로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기리게 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입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일제강점기 광주지역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입니다. 당시 광주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요.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이었으며 때문에 항쟁 주체는 학생이었으나 민족 전 계층이 지지하고 성원한 운동입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과 여도현이 교규문란을 이유로 당한 퇴학이 시작이었습니다. 두 학생의 퇴학으로 학교 내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는데요. 6월 26일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던 날, 5학년을 비롯해 2,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를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또한 이날 통학열차에서는 일본인 중학생 한 명이 ‘한국인은 야만스럽다’고 말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충돌이 있었는데요. 이후 일련의 충돌들이 이어지며 광주지역 한일 학생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은 11월 3일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대항일 학생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광주학생운동은 광주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시위나 동맹휴학의 형태로 확대되었습니다. 또한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파급되어 만주의 간도와 길림성, 중국의 상해, 북경 그리고 일본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격려하는 집회와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요.

 

이처럼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30년대 조선의 독립운동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불씨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항쟁을 학생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애국심과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은 1953년 처음 [학생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3월 30일 폐지된 후 2006년 2월 9일 다시 국회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어 의결되어 법정 기념일이 된 의미 있는 날인데요.

 

 

우리나라에 자랑스러운 학생들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일제식민지정책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이 기념일은 참으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 기념일로 인하여 요즘 우리 젊은 청년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을 상기시켜주는 뜻 깊고도 의미 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 역사속에서 기억해야 할 학생운동가 3명도 같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학생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첫 번째 독립운동 인물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관순 열사입니다. 1902년 12월 16일에 천안에서 태어난, 3.1운동의 불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학생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는 분이시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 학당에 들어갔으며 3년 후인 1919년 삼일운동(3.1)이 일어나자 이화 학당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였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진두지휘한 학생 삼일운동 열기에 놀란 일본은 전국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며 삼일 운동의 열기를 잠식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휴교령으로 유관순 열사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죠.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님은 이미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후였으며 유관순 역시 심한 고문에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1920년 9월 28일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주학생운동의 불씨

박준채 열사

 

 

박준채 열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입니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29년 사촌 누이인 박기옥을 희롱하고 조선인을 모욕하는 일본인 학생에 격분해 충돌했고,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점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광주학생운동은 알려진 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의지와 활력을 불어넣었고, 그는 거사에 적극 참여하다 붙잡히게 되었고 퇴학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학장, 여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내고, 5·18 민주 항쟁 때에는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무사히 도쿄에서 조선으로 옮겨온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열사

 

 

두 번째 학생 독립 운동가는 김마리아입니다. 김마리아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아버지인 김필순은 독립군을 치료한 의사이며 어머니 김순애는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일본의 잔인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며 독립선언서를 숨겨온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 독립 운동인데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인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에 김마리아 역시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습니다.

 

 

2.8 독립선언 이후 조선에서도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마리아는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조선으로 전하는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됩니다.

 

김마리아는 일본인으로 변장하여 10장의 독립선언서를 성공리에 조선으로 가져오는데요, 이로 인해 조선에서 같은 해 3.1일에 독립 선언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굳건한 심지와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학생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이 땅 위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회적 집회도 많죠. 뜻을 가진 많은 국민들의 참여가 있다면 오늘날 역시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만들어 지리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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